무한 엘리베이터 (infinite elevator)

paper(텍스트) ·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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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에 펼쳐진 여섯 대의 엘리베이터

본능적으로 무엇을 타야 할까 시작된 야바위 게임

불현듯 정수리 위로 떨어진 비석 같은 쪽지

 

꼬깃꼬깃 접혀있는 종이쪽지를 한 칸씩 펼쳐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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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층으로 올라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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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층으로 올라오세요’ 라는 문장에는

영문도 의문도 가질 수 없을 정도의 소름과 공포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노예가 된 듯이 빨리 올라 가야겠다는 생각이 온 뇌를 지배하여

‘그러면 먼저 도착하는 칸을 탑승해야겠다’ 라는 현명한 판단력.

 

검지 손가락으로 △ - ▲ 버튼을 누르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립니다.

맑은 종소리와 함께 도착했다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안에 있는 버튼은 1F와 5F뿐

5F를 누르니 문이 닫히고,

거대한 비닐 날개를 지닌 벌레가 도약하듯 굉음을 내며 작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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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

 

맑은 종소리와 함께

도착을 알리는 엘리베이터

1F에 도착했다.

 

‘버튼을 잘못 눌렀나 보구나’ 라는 자기 객관화

다시 검지 손가락으로 △ - ▲ 버튼을 누르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립니다.

다시 문이 열리며 안에 있는 버튼은 여전히 1F와 5F뿐

5F를 누르니 문이 닫히고

거대한 비닐 날개를 지닌 두 번째 벌레가 도약하듯 굉음을 내며 작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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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

 

맑은 종소리와 함께

도착을 알리는 실수의 엘리베이터

 

1F에 도착했다.

 

‘믿기지 않지만 무언가 이상한 것 같다’ 는 상황적 의심

다시 검지 손가락으로 △ - ▲ 버튼을 누르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립니다.

다시 문이 열리며 안에 있는 버튼은 여전히 1F와 5F뿐

5F를 누르니 문이 닫히고

거대한 비닐 날개를 지닌 세 번째 벌레가 도약하듯 굉음을 내며 작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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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

 

맑은 종소리와 함께

도착을 알리는 의심의 엘리베이터

 

 

역시나 1F에 도착했다.

 

 

‘지금 육체가 많이 피곤한가 아니면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나’ 라는 자기 의심과 상황적 의심

다시 검지 손가락으로 △ - ▲ 버튼을 누르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립니다.

 

‘돌이켜보니 엘리베이터 몇 개나 있었지, 지금처럼 하나였을까’

 

다시 문이 열리며 안에 있는 버튼은 여전히 1F와 5F뿐

5F를 누르니 문이 닫히고

거대한 비닐 날개를 지닌 네 번째 벌레가 도약하듯 굉음을 내며 작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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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

 

맑은 종소리와 함께

도착을 알리는 검증의 엘리베이터

 

지옥의 1F에 도착했다.

 

‘악마에게 최면에 걸린 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잖아’ 라는 미신적 확신

다시 심각한 검지 손가락으로 △ - ▲ 버튼을 누르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립니다.

 

이젠 ‘받았던 쪽지에 무엇이 적혀 있었더라’ 라는 안개에 파묻힌 기억 손실

 

다시 문이 열리며 안에 있는 버튼은 여전히 1F와 5F뿐

5F를 누르니 문이 닫히고

거대한 비닐 날개를 지닌 다섯 번째 벌레가 도약하듯 굉음을 내며 작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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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

 

뇌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도착을 알리는 검증의 엘리베이터

 

1F에 도착했다.

 

‘기어코 악마에게 최면에 걸렸구나’ 라는 지옥 밑바닥까지 꺼져버린 허탈한 한숨

무기력한 검지 손가락으로 △ - ▲ 버튼을 누르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립니다.

‘쪽지의 행방을 찾습니다. 쪽지의 내용을 찾습니다.

여긴가 어딘지 알려주시면 사례하겠습니다.

거기 누구 안 계세요.

저기요 누구 안 계세요. 계신다면 아무 소리라도 내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문이 열리고 그대로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이번엔 타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비닐 날개를 지닌 여섯 번째 벌레가 아쉽게도 도약을 중단합니다.

[비상구]라는 머릿속에 내리치는 한 줄기 번뇌.

 

‘저 문으로 가면 될 걸. 왜 진작 몰랐을까. 등잔 밑이 어둡구나’

 

예상과 다르게 뚫지 못할 두툼한 벽과 약간의 틈

그 틈에 비치는 풍경은 가히 장관이구나.

그동안 하늘의 색은 몇 번이나 바뀌었을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배가 고프거나 잠이 오진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수많은 시간이 흘러가도 춥거나 배가 고프거나 잠이 오진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다만, 이유를 찾을 순 없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배가 고파야 하는,

잠이 쏟아져야 하는,

이런저런 것들이요.

됐고 그 틈에 보이는 풍경은 가히 장관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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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의 행방은 괜찮습니다. 쪽지의 내용도 괜찮습니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구 안 계시나요

혹여나 계신다면 쥐 죽은 듯이 입 틀어막고, 조용히 살아 계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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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이유를 찾은 것 같습니다.

오오, 그 틈에 보이는 풍경은 가히 장관이구나

설레는 마음을 지닌 채 아름다운 틈 속으로 두 팔 벌려 뛰어 들어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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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