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that's the vampire bed you see over there)

paper(텍스트) · 2024

 

 

 

  

허무한 황야를 달리는 붉은 고물 경차

운전석에는 나,

우편엔 사랑하는 이와

뒤편엔 얼굴 없는 남자가 앉아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울퉁불퉁한 길을 파편처럼 질주합니다.

들뜬 심정으로 고물 경차에 모든 걸 맡긴 용감한 삼인(三人)

 

붉게 물든 경차는 단숨에 빛을 잃은 채 검은 회색빛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찾아온 적막이 의문스러워 하늘을 내다보았습니다.

세 마리의 개미로 변태 시켜준 광활한 거목의 뿌리

크기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천공의 바다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하늘을 통째로 덮어버린 우리의 행복한 여정을 망쳐버린 거목의 뿌리

 

‘이게 무슨 어마어마한 장관인가. 개미는 이런 느낌이었을까요?’

 

핸들을 잡고 있던 두 양손이 감전된 것처럼 발발 떨리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나무는 따뜻한 존재 아니었나요?

우리에게 나무는 생명력 넘치는 자연의 근간이 아니었나요?

 

‘나의 사랑하는 연인이여. 얼굴 없는 그대여. 입이 있다면 대답 좀 해봐’

-‘에베베베베’

‘무슨 말인가. 장난칠 때가 아니라네. 입이 있다면 대답 좀 해봐’

-‘에베베베베’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맞아.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짓눌려 한 순간 지능을 잃어버린 사랑하는 연인과 얼굴 없는 남자

당장이라도 영혼을 가져갈 듯한 사망을 마주한 듯이

침을 질질 흘리는 사랑하는 연인과 얼굴 없는 남자

본능처럼 신속하게 세워진 용감한 삼 인의 첫 계획

 

[1. 공포를 무찌르고 거목의 뿌리로부터 벗어나기]

 

울퉁불퉁 황야를 가로지르는 검회색 고물 경차 앞에 놓인 거대한 두 개의 검은 터널

 

‘우선 저기로 피해 가야겠어. 라이트를 어떻게 켰더라’

발발 떨리는 두 양손 꽉 쥔 채, 오로지 육감으로 들어간 오른쪽 터널

한 칸 한 칸씩 라이트에 비추는 수많은 벽돌 그 경계 다음은 까마득한 어둠

그다음이 궁금하여 한 칸 한 칸씩 라이트에 비추는 수많은 벽돌

오른쪽 검은 터널이 주는 무한한 빛의 가혹한 장난질

 

[1. 공포를 이겨내고 거목의 뿌리로부터 벗어나기]

 

‘나의 사랑하는 연인이여. 얼굴 없는 그대여. 도대체 얼마나 지나온 걸까’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맞아.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나의 사랑하는 연인이여. 얼굴 없는 그대여. 도대체 계속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맞아.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놀란 심장에 기억이 전혀 나질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잠시만.이럴 수가, 이 길은 끝이 없는 호기심과 욕망, 밑 빠진 인간의 항아리!’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짓눌려 지능을 잃어버린 사랑하는 연인과 얼굴 없는 남자

곧 영혼을 가져갈 듯한 사망을 만난 듯이 침을 질질 흘리는 연인과 얼굴 없는 남자

본능처럼 세워진 용감한 삼인(三人)의 두 번째 계획

                                                                                      

[2. 빠르게 유턴하여 이 검은 터널에서 빠져나오기]

 

‘만일 왼쪽 터널로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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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는 무차별적인 살인을 인정합니까?’

-‘존경하는 판사님, 피고는 당시 무리의 위협과 자신의 사랑하는 연인을 지키기 위해…’

-‘존경하는 판사님, 피고의 변호사는 피고의 잔인성을 무시한 채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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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비친 시간을 공중으로 날린 채 길고 긴 검은 터널에서 빠져나왔습니다.

두 번째 계획은 성공했습니다.

[2. 빠르게 유턴하여 이 터널에서 빠져나오기]

 

그리고 다시 생성된 첫 번째 계획

[1. 공포를 이겨내고 거목의 뿌리로부터 벗어나기]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짓눌려 지능을 잃어버린 사랑하는 연인과 얼굴 없는 남자

곧 영혼을 가져갈 듯한 악마를 만난 듯이 침을 질질 흘리는 연인과 얼굴 없는 남자

본능처럼 세워진 용감한 삼인(三人)의 세 번째 계획

 

[1. 공포를 이겨내고 거목의 뿌리로부터 벗어나기]

[3. 어디든 좋으니 숨을 곳을 찾아 두 사람 안전에 각별히 기하기]

 

엉뚱하게 놓여있는 고독한 낡은 모텔

저기로 향해가면 당분간은 숨어 있을 수 있겠습니다.

다만 거목의 뿌리를 바라보니 저도 곧 공포에 짓눌려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겠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연인이여. 얼굴 없는 그대여. 조금만 참고 있어. 거의 다 왔어.’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맞아.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나의 사랑하는 연인이여. 얼굴 없는 그대여. 여기 얌전하게 있어.’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맞아.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아무 빈방이나 세 명 묵을 수 있는 곳으로 부탁드립니다.’

[1. 공포를 이겨내고 거목의 뿌리로부터 벗어나기]

 

발발 떨리는 두 고사리손으로 건네받은 피 냄새 나는 녹슨 열쇠

엘리베이터를 타고 두 사람을 끌고 가 방 안에 가두어 놓습니다. 열쇠는 바지 주머니에

 

‘나의 사랑하는 연인이여. 얼굴 없는 그대여. 여기 잠자코 가만히 있어’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맞아.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우선은 입구에 붙어있던 작은 슈퍼로 들어가 생필품을 사러 가야겠습니다.

느낌이 수상합니다. 이 모텔에는 유독 험상궂은 손님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험상궂은 이들도 광활한 거목을 피해 온 거겠죠?’

 

‘음… 칫솔… 치약… 비누… 속옷… 물티슈… 수건… 그리고 또….

 

‘나의 사랑하는 연인이여. 얼굴 없는 그대여. 어떻게 여기까지 내려 왔어.’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맞아.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나의 사랑하는 연인이여. 얼굴 없는 그대여. 옷은 왜 그래. 빨리 방으로 다시 돌아가.’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맞아.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나의 사랑하는 연인이여. 얼굴 없는 그대여. 잃어버린 지성은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맞아.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사랑하는 연인은 끈으로 된 한 벌의 짧은 치마 형태를 한 핏빛 슬립만을 입은 채 헐벗고 있었고, 얼굴 없는 남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체 상태였습니다. 다만, 그런 건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신체가 안전만하다면 세 번째 계획은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제 불안한 예감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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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판사님, 피고의 사건은 정당방위입니다. 왜냐하면…’

-‘존경하는 판사님, 피고의 행동이 정당방위라고 하기에는 여기 제출한 증거 사진을 봐주십시오. 이게 대체 어떻게 정당방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피고 외 2인은 상해가 있었나요? 다시 한번 피고 측에게 질문하겠습니다. 피고 외 이인(二人)은 상해가 있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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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상궂은 무리는 이윽고 가게 안을 점령했고 어느 한 남자가 사랑하는 연인을 흘깃흘깃 바라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대놓고 가슴골을 쳐다보는 행동까지 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결제 부탁드릴게요. 네. 전부 봉투에 담아 주시겠어요?.’

 

 

물론 심정만큼은 즉시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세 번째 계획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이 많은 험상궂은 이들을 제압할 순 없겠지만요. 계산을 마치고 뒤를 돌아보니 바닥에 노란 커터가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노란색이 한 줄기 빛처럼 보였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연인이여. 얼굴 없는 그대여.’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맞아.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일은 순식간에 벌어져 있었습니다. 가슴골을 바라보던 험상궂은 이는 등을 벽에 기대어 사지가 늘어진 채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안면은 마치 종이를 자를 때 책상에 흠이 나지 않도록 종이 밑에 깔던 또 다른 받침지 같았습니다. 제 앞에 널브러져 있는 이 자의 얼굴이 험상궂은 것으로는 여기 낡은 모텔에선 단연 일 등일 것 같습니다. 모든 게 연결되어 느껴버린 비통한 손끝이 떨리긴 합니다.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많은 것을 되짚어보았고 잃을 것도 없었습니다. 잃을 것을 잃어버릴까 이상(以上)의 노력했다는 것에 스스로 대견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연인이여. 얼굴 없는 그대여. 이제 얼른 방으로 돌아가자’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맞아.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나의 사랑하는 연인이여. 얼굴 없는 그대여. 깨끗이 씻고 편히 잠들자’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맞아. 저기 보이는 건 바로 뱀파이어의 침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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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디든 좋으니 숨을 곳을 찾아 두 사람 안전에 각별히 기하기]